모스크바 타운은 프라그멘툼 속 모스크바라고도 불린다. 연맹에 오긴 했지만 알비노들과 섞여들지 못한 모스크바인들, 혹은 사업차 잠시 연맹에 들른 모스크바인들이 머무는 곳이다. 하지만 타운의 3할만 재맹在盟 모스크바인들의 거주지고, 나머지 7할은 모스크바계 유흥가였다.
ㅡ당신이 못 견뎌도 언제든지 놓아주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당신이 나한테서 뭘 기대해야 하는 지는 확실히 생각해봐. 그리고 결심이 서면, 사인을 하거나, 그 종이를 찢어버리면 돼. 사인을 한 후에야, 우리는 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거니까.
거 참, 설마 베푸는 것으로 공격할 줄은 몰랐다. 유흥가로 접어든 세르게이가 뒷목을 긁으며 웃었다.
정말이야. 정말 내가 못 견디고 있는 것 같아.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게 되잖아.
유흥가에서도 조금 눈에 덜 띄는 곳에 있는 샛길로 구두코를 틀었다.
──#14. 친절한 오가레프 씨 (1) 부지깽이꽃.
090525 곰국
"짜르는 잘 계신가?"
세르게이가 물을 때마다 삐끼들이 아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네 번째로 말을 붙인 꽁지머리 삐끼가 가슴에 손을 붙이며 손님을 맞이하는 시늉을 했다.
"바실리 폐하 말씀이시죠? 많이 편찮으시지만 그럭저럭 잘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예, 단속이 심해 조금밖에 없긴 하지만 저희 가게에 마약 '뇌제雷帝'가 있습니다.'를 뜻했다. '뇌제'는 모스크바 제국을 다스렸던 짜르, 바실리 1세의 별칭이자, '그리샤트카'라는 꽃에서 추출되는 강력한 모스크바산 마약의 별명이었다. 골과 척추는 물론이요, 두 눈알까지 번개를 맞은 듯 짜릿하게 관통해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잠시 알현해볼까."
"예이, 이쪽으로!"
피스는 지금쯤 일 다 끝내고 기차 안에 있으려나.
예쁜 꽁지머리 청년이 안내하는 대로 세르게이는 업소의 지하계단을 휘적휘적 걸어내려갔다.
*
"저어기 잘리다 만 숲이 보이나?
우리 때만 해두 한 그루도 잘리지 않은 울창한 숲이었지. 어린 폐하께서는 저 숲 어귀에서 말을 타고 노는 걸 좋아하셨어. 얼마 안 있어 우리 카자크들만큼 말을 잘 다루시더군. 말 다루는 솜씨가 여간내기가 아니셨지. 부황父皇의 피를 고대로 이어받으셨던게야…. 허지만 부황의 권력까지 고대로 이어받은 건 아니어서 그 어린 나이에 온갖 고생을… 하이구, 말론 다 못혀, 그거. 중앙귀족들 등쌀에 그렇게 고생을 하셨다네. 말이 짜르(황제)지 공식행사 때만 짜르 노릇을 할 수 있었어. 나머지는 이 척박한 땅에서 누더기 차림에, 온갖 괄시와 모욕에, 멘날 메칠 쫄쫄 굶으시고…. 누이 나타샤 아가씨는 결국 열 살도 못되어 돌아가셨지.
그래도 폐하는 참 쾌활하게 자라나셨어. 교회 옥상에서 새끼양을 떨어뜨린다거나, 고양이 새끼를 잡아 이마서부터 거죽을 좍 벗겨내고 물에 풀어준다거나 하셨지. 슬슬 힘을 되찾아가던 열 일곱살 무렵에는 귀족들 회의장에 뛰어들어가 고 년넘들 얼굴에 궁 경비견들을 풀어놓으셨다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어찌나 잘 웃으시던지!
그리고 황권을 되찾으신 폐하는 수많은 치적을 남기며 이 모스크바 제국을 약소국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던 게야.
함부로 돌을 던지지 말게, 그 분은 그 분일 따름이야.
뇌제雷帝 바실리 1세-!"
없는 사람을 부르짖으며 노인은 양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오가레프는 화들짝 놀라며 그 대나무같은 팔을 피했다.
"하지만 류바 할아버지, 바실리 1세는 난폭한 짜르였어요. 뇌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흉폭하고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있었죠. 짜르만 아니면 영락없는 사형수 흉악범이 되었을 사람이에요. 그 사람 때문에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유사 이래 황권강화에 피바다가 따르지 않은 적은 읎다."
"며느리를 유산시키고 아들을 부지깽이로 때려죽였어요."
"그리샤트카 황태자 건은 고의가 아니셨어. 그 분도 가슴을 치며 후회하셨지."
"할아버지의 아들도 그 사람 때문에 죽었어요…!"
"…원죄는 그 돼지같은 귀족들에게 있어. 그 치들이 그 분을 그런 사람으로 만든 게야. 가엾은 분, 어이구, 가엾은 분…!"
오가레프는 소중히 껴안은 어항의 표면을 뽀득뽀득 문질렀다. 작고 날렵한 수컷 물고기가 통통하게 배가 부푼 암컷 물고기의 꼬리 밑에 끈덕지게 제 주둥이를 따라붙이고 있었다….
"…정말 그런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어때요, 흥미로운 얘기죠? 이게 바로 제가 전해 들은 저희 나라의 뇌제-, 바실리 1세의 이야깁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전前 황제지만요. 좀 심심풀이 거리가 되셨을려나."
"물론입니다, 오가레프 씨. 권력을 위해 피바람을 몰고 온 왕이야 어느 나라 역사책에나 하나씩 있겠지만, 그 왕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건 또 색다른 재미가 있군요."
정말 그랬다는 듯 피스는 눈 앞의 동행자에게 웃어보였다. 우연히 동석하게 된 사람이지만 참 명랑한 남자인 것 같다. 기차가 아키텐 역을 떠나온 뒤로 거의 한숨도 쉬지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제 피스는 오가레프란 남자가 서른 다섯이라는 제 나이를 허무해하고 있다는 것, 모스크바 제국 교도소에서 간수로 일했다는 것, 아버지와 프라그멘툼에서 산 지 3년이 넘었다는 것, 늙은 아버지는 두 다리가 불편하시다는 것, 그래도 아들을 늘 보듬어주는 인자한 분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바실리 1세는 말년에 당신의 행동을 뉘우쳤지만 이미 죽은 자들에게 속죄할 길이 없었죠. 대신 그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모스크바의 울창한 숲 사이를 말로 내달리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말예요. 그러다 숲에서 빨갛고 예쁜 꽃무리를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꽃에 아버지에게 맞아죽은 불행한 황태자 '그리샤트카'의 이름을 붙여주었답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꽃은 가장 강력한 마약이 될 수 있는 꽃이었다는 거죠. "
"과연. 뇌제는 끝까지 얄궂고도ㅡ, 어리숙하게 마무리를 지은 겁니까."
피스가 그 말을 끝내자마자 차내 스피커에서 도착지까지 5분도 남지 않았음을 알려온다. 뇌제 바실리 1세의 이야기는 보따리 속 그 수많은 이야기들과 짧은 여행의 끝자락을 함께 묶는 멋진 마지막이 될 모양이었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도 아닌 모스크바 제국의 이야기라 별로 아쉽지 않았다. 'Nah, 그럼 내가 너한테 해 줄 얘기가 줄어든 거잖아.'라고 능청스럽게 한숨을 쉴 어디의 보좌장 님이 있으니까.
"엇차차…."
명랑한 동행자 오가레프는 의자 위 선반에서 제 코트를 집어들더니 피스의 짐까지 같이 내려주었다.
"피스 씨 꺼 맞죠?"
"네, 감사합니다, 오가레프 씨. 두 시간 동안 들려주신 재미있는 이야기들도요."
"하하, 저야말로 피스 씨 덕에 지겹지 않게 온 것 같네요.
아,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바실리 1세는 아픈 사람 아니었겠습니까."
오가레프는 고개를 숙여 코트 단추를 차례차례 잠궜다.
"교도소에서 간수 노릇을 하며 알게 되었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적하듯, 교도소는 범죄자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범죄자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는 걸 말예요. 그 곳에 교화는 없습니다. 교도矯導란 말은 잘못된 이름이지요. 격리수용소라는 말이 적격입니다.
재소자들, 특히 흉악범들이 죄를 지은 건 그것이 바로 그들의 확립된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아픈 사람들이랄까. 그런데 교화는 없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격리만 되어있으니 속죄가 없습니다. 유전, 생활환경, 가정사, 소외받고 괴롭힘당했던 기억…. 그들에게 억지로 떠넘겨진 원죄를 안다고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건 류바 노인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속죄하길 바라는 사람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겐 안된다!' 라고요."
점점 느려지던 기차가 완전히 멈추어 섰다.
"스스로를 위한 구원이 끝났을 때 비로소 남을 위한 구원- 속죄로 넘어갈 수 있겠지요. 인간은 이기적이니까요. 전 그것을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만큼은 말입니다."
오가레프가 피스를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피스는 오가레프가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가레프가 제 가방을 집어들었다.
"이제 피스 씨도 거기서 내려야겠군요."
그렇게만 말하고 오가레프는, 통로를 가득 메운 채 꿈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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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제 이야기는 실제 러시아의 황제였던 '뇌제' 이반 4세의 이야기를 거의 고대로 따왔습니다.
이번 텀에 하고 싶은 얘기가 좀 많아서 벳님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네용.....ㅠ0ㅠ.......
일단 (1)로 끊었어요ㅠㅠ...벳님 텀까지 가려면 좀 더 써야되구요.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싶은데 참 어려워요..
제 재주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 게 아닐까 걱정되지만 일단 열심히 해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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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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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백업
리젠
2009/05/25 19:04답글|신고
거기서 내려야겠다는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네용..아침에 급하게 읽느라 무슨내용인지 모르고 갔다가 집에 와서 다시봤습니당[...] 두..두분 같이 쓰시는건가용?!?!?!?!?! u/////u
스스로를 위한 구원을 끝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버겁다고 생각하는데 .. 흠...
엘리피스
2009/05/25 19:18답글|신고
이야기 연계인가요 우와ㅠㅠㅠ 무언가 숨겨진 것이 더 많을 듯한 서두네요. 보물상자라도 열어보는 것처럼 두근두근하구! 기대하겠습니당!-////-
이베트
2009/05/25 20:42답글|신고
저는 항상 말씀드리지만, 꾹자기님의 글을 받으면 마치 지도를 선물받은 기분이에요. 어린아이에게 다정하지만 장난기 많은 삼촌이 보물지도라고 속삭이며 건네주는 그러한 지도를, 두 손에 한가득 펼쳐내어 '자아, 어디에 보물이 있을까!'하고 두근두근거린답니다.
꾹자기님의 글은 항상 삼차원, 사차원적이라 그 높이와 깊이에 깜짝 놀라고 한답니다. 이 글도, 몇번을 내리읽으며 건물에 들어온 기분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공고한 구체화는 쉽사리 할 수 없는 것인데, 꾹자기님은 그걸 참 잘 하셔요. 2차원, 1차원의 세계에서 글을 흘리는 저로는 참으로 부러운 능력입니다ㅜ
맛깔나는 대사, 입체적인 조망, 잘 지어진 새 건물 속에서 홀로 걸어가는 느낌이 참 좋네요. 세르게이와, 여행에 풍미를 더해주신 오가레프, 피스. 이 글에서 오가레프는 퇴장을 할 듯하지만, 어쩐지 오가레프의 그림자는 다음 글에서까지 남아 있어 긴 그늘을 선물할 것 같습니다.
이베트
2009/05/25 20:45신고
'거기에서 내려야 한다'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전 '자기를 위한 구원에서 피스가 벗어나야 한다' 혹은 '자기를 위한 구원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피스가 기다려야 한다'라는 의미에 중점을 두고 싶네요. 사실, 이 말은 피스에게만 한정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르게이 또한 의식하지 않는 구원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피스가 세르게이보다 그것을 절박하게, 어쩌면 경건하게 갈구하고 지켜내고 있기에 피스에게 의미를 치중해보았습니다.
글에서 펼쳐치는 이국적인 풍경 또한 꾹자기님의 글의 독특한 매력이에요. 물씬하게 풍겨나는 잿빛 에로스, 또는 그 것을 도화지 삼아 번지는 핏빛 장미 정원 같은. 아아,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또 꾹자기님의 다음 글을 기다리며 이 험한 과제의 나날들을 버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고 갑니다.
이베트
2009/05/25 20:50신고
용기를 얻고 간다고 끝을 맺었으면서도 문득 더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는 걸 보면, 전 아무래도 바본가 봅니다. 뇌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군가와 계속 오버랩된다 싶었더니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였네요. 어디를 가나, 언제를 보나, 비슷한 양상을 다른 양상 못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그리 별로 다르지 않은 생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정말로, 댓글을 마칩니다. 이만 총총.
네로
2009/05/25 21:10답글|신고
우와 참 멋나구요~!!!실제 이야기에 모티브를 따오셨다니...멋지네요ㅎㅎ연계라니, 두 분 열심히 하셔요><!!!
레이크
2009/05/30 19:15답글|신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제나 저는 이벳님의 덧글에 격침당하고 갑니다 ㅠㅠㅠ 꾹님과 이벳님 커플을 보자면, 두분의 글도 정말 훌륭하고 멋지지만 댓글도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0^ 마치 문학작품을 읽고나서 뒤에 비평가의 해설을 보는 느낌이야 ^0^ 꾹님 수고하셨어요!!!/안마안마/주물주물
2편 기대할께여 ><